끄적끄적

박사과정에서의 논문쓰기

blueray 2013. 9. 4. 06:11

 

 

 

 

재무전공으로 박사과정을 하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점을 꼽으라면

이 길이 내 적성과 능력에 맞는 길인지 좀처럼 확신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터뷰에 나오는 잡스의 말처럼 어떤 분야에서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그 일을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창피한 얘기지만 나는 박사과정이 거의 끝날 때까지 재무 분야의 논문쓰기가 재미있다고 느껴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사회과학 분야가 대부분 그렇듯이 경영학 분야의 논문은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그럴듯하게 하는가의 싸움인데,

수식만 풀던 이공계 출신자인 나로서는 그것에 쉽게 적응하지 못해 동기부여가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범생이 스타일인 성격상 무조건 열심히 하긴 했지만, 재미가 없는 공부를 의지만으로 쉬지 않고 지속하는 것은 사람을 점점 지치게 만들었다.

 

수년간을 그렇게 의무감만으로 힘들게 공부하다가,

논문을 읽고 쓰는 것이 약간이나마 재미있다고 처음 느낀 것은 박사과정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박사논문 심사를 받을 즈음부터

논문들이 이전보다 쉽게 이해되고 머릿속에 정리가 되면서 무엇이 재미있는 이슈인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발전시켜 논문으로 써볼만한 괜찮은 주제가 꽤 많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아마도 몇 년간 지식이 쌓이면서 논문을 보는 시야가 조금은 넓어져서인 것 같다.

그때부터 논문읽고 쓰는 것이 조금씩 재미있어졌고, 반 년이 지난 지금도 별로 힘든 줄 모르고 논문작업을 하고 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박사과정 중에 공부가 적성에 안맞는 것 같고 그 때문에 정신적으로 방황하며 힘들었던 것은 

보통의 능력을 가진 대학원생들이 의례 겪어야 하는 하나의 지나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 덕분에 박사과정을 지내면서 앞으로의 인생에서 어떤 일을 택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극소수의 천재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를 찾아내서 그것을 파고들어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나이가 꽤 들 때까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찾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저런 분야를 시도해보게 되는데, 어떤 분야이든간에 그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기본기를 배우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 과정을 견뎌내고 기본기를 충실히 다지면 그 이후부터는 그 분야에서 보다 창조적인 일을 찾아

본격적인 흥미를 갖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기본기를 연마하는 단계에서 노력만큼 쉽게 성과가 나오지 않고

단순반복이 지겹다고 느껴지거나, 잦은 실패를 경험하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포기하고 만다.

 

박사과정도 비슷한 것 같다. 지금 와서 보니 처음부터 즐기면서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남의 논문이 이해 안돼서 밤새 괴로워하고, 자신의 논문이 냉정한 평가와 함께 리젝통지를 받으면서

수 년간 실패를 거듭하는 경험들을 거쳐야만 비로소 기본기가 닦이면서 연구자로서 논문쓰기를 '즐길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 같다.

그 과정에서 겪는 숱한 시행착오들은 결코 시간낭비가 아니며, 머릿속에 연구역량으로 축적되어 나중에 다른 논문을 쓸 때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된다. 근데 만약 이 기초과정을 인내하고 견디지 못하면 차후에 연구를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져버리고 만다.

 

박사과정 동안 개인적으로 대단히 훌륭한 논문 같은 것은 쓰지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고 여기까지 와 보니 처음보다 공부가 훨씬 재미있고

앞으로 이 분야의 일을 계속 한다면 평생 즐기면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든 것은

박사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얻은 가장 큰 소득인 것 같다.

더이상 공부가 힘들지 않은 것만으로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박사를 졸업했는데도 공부에 확신이 없으면 그것만큼 막막하고 불행한 것도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