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좋은 강의의 조건

blueray 2010. 7. 1. 03:05




공대 학부시절 들었던 강의 중에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유한일 교수님의 물리화학(2학년)과 고체결함화학(4학년) 강의다.
 
두 수업의 내용은 상당히 어려워서 당시엔 열심히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내용을 잘 모르니 학점도
별로였다. 군대가기 전에 들었던 물리화학은 C를 받아서 한 학기를 재수강했고, 복학해서 들었던 고체결함화학은 A-  중에 꼴찌였다.
(고체결함화학은 복학생이라고 불쌍해서 그랬는지 교수님이 특별히 학점을 올려주신듯 하다.ㅡㅡ;;)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한일 교수님의 수업이 기억에 남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교수님은 강의내용과 관련된 보조자료를 수업 때 들고와서
사용하신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유한일 교수님은 수업내용을 요약한 강의노트도, 파워포인트도, OHP 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교수님이 수업때 가지고 들어오시는 것은 오직 분필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분필 하나로, 칠판 가득히 필기하고, 설명하고,
지우고, 또 가득히 필기하고를 반복하셨다.

이게 수업을 듣는 학생입장에서는 참 놀라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열역학의 이론전개에 등장하는 수식들은 진도가 나갈수록 엄청나게
복잡해지고 개념도 점점 추상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 방대한 분량의 수식을 참고노트 하나없이 기억에만 의존해서 칠판에
써나간다는 건, 적어도 내 눈에는 경이롭게 보였다. 그런데도 그 많은 수업에서 교수님은 단 한번의 막힘이나 망설임도 없었다. 

헐..아무래도 저건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닌 것 같다..-_-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 아마도 서울대 학사 - MIT 박사를 하신 분이라 천재라서 그런가보다..가 당시에 내가 내렸던 결론이었다.

고학번만 15명 남짓 듣던 4학년 고체결함화학 과목이 종강하던 날, 낙성대 블루트레인으로 교수님을 모시고 가서 종강파티를 했다.
술이 약간 들어가서 다들 기분이 좋아졌을 무렵..제일 궁금했던 것을 교수님께 여쭤보았다. (꼭 비결을 알아야겠다는 일념으로..ㅋㅋ)

'교수님은 수업할 때 분필 하나만으로 수업을 하시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내 질문에 대한 유한일 교수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거..수업 전에 엄청 공부해서 머릿속에 다 외워넣는 거야. 다른 비결이 있겠나. 다 외워서 하는 거지."

"그냥 강의노트 같은거 들고 오셔서 보고 쓰셔도 되지 않습니까? 그럼 훨씬 힘도 덜 드실텐데요."

"그래도 되지만, 그렇게 하면 문제가 있어. 학생들의 눈을 못보게 돼. 내가 학생들의 눈을 볼 수 있어야 학생들이 이해하는지를 
느낄 수 있고, 학생들을 설명에 집중시킬 수 있어. 강의노트를 보면서 칠판에 쓰면 그게 안돼. 난 그래서 수업 때 강의노트 같은 걸 
사용하지 않아."


결국 그 복잡한 수식을 틀리지 않고 머릿속에 완벽하게 기억해서 우리에게 설명해주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연구실 책상에서 
교수님도 암기를 거듭했던 것이다. 사실 교수의 입장에서 학부강의에 큰 공을 들여 준비할 인센티브는 별로 없었을지 모른다.
대부분의 공대 교수는 강의외의 일로 항상 엄청나게 바쁘고, 그때까지만 해도 강의평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시절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부 학생들을 위해 그렇게 애썼던 유한일 교수님께 지금도 새삼 고마움과 존경심을 느낀다.

이번에 동국대 강의를 맡으면서 나 역시 어떠한 참고자료도 없이 수업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었다. 그러나 처음 맡는 수업이라
리스크가 크다보니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하고 내키지 않는 파워포인트 강의를 하고 말았다. 

앞으로 조금만 더 경험을 쌓고나면 파워포인트를 쓰는 강의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강의를 해보니 역시 참고자료를 보면서 설명하는 
형식의 강의는 학생과 교수에게 모두 독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강의는 유한일 교수님의 말씀대로 학생과의 eye-contact 이
어려워져서 학생들의 집중력 저하를 피하기 어렵다. 게다가 참고자료를 쓴다는 것 자체가 결국 교수의 머릿속에 수업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아서 사실은 교수가 수업에 자신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수업을 돕는 보조자료의 기술(파워포인트, 동영상, 등등)이 아무리 발전해도, 결국 옛날방식대로 교수가 칠판에 하나하나 쓰면서
설명해나가는 것이 학생입장에서는 가장 유익한 (반대로 교수 입장에선 제일 괴로운) 강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힘들더라도 이런 방식의 수업에 반드시 도전을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