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아이들로부터 배우다

blueray 2010. 6. 1. 22:30


(한학기 동안 수업했던 금융론 강의실)



처음 동국대에서 강의를 맡으면서 가장 큰 걱정거리이자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수업내용을 아이들한테 알기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거였다.
외부강의를 처음 해보는 초보강사인 나로서는
수업 전날엔 잠을 줄여서라도 내용설명을 머릿속으로 리허설을 해보고
막히는 부분이 있는지 점검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도 처음이라 버벅거리기가 일쑤였다...부족한 수업을 열심히 들어주는 애들에게 그저 미안할 뿐..)


그런데 막상 한 학기가 거의 끝나가면서 느낀 것은..
교수의 의무는 단순히 수업준비를 완벽하게 하는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주에 수업 끝나고 찾아와 상담을 요청했던 어떤 실업계 고교출신 여학생과 이야기하면서
학생들을 대할 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어려운 상황에 놓인 소수 학생들에 대한 '배려'였다.


같은 강의실에서 수업을 들어도 알고보면 불리한 환경에서 힘겹게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있다.
내가 90년대 대학에 다닐 때와 달리 요즘은 특례입학제도가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에
농어촌 지역 출신이나 실업계 고교 출신 학생들이 강의실에 상당수 섞여 있다.
이런 학생들에 대해 교수의 의식적인 배려가 반드시 필요한데,
오직 성적순으로만 학생을 뽑았던 우리 세대 때는 겪어보지 못했던 일이라서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실업계 고교 출신 학생들의 경우엔 영어와 수학의 기초가 약해서  
영어원서와 수학 위주의 재무관리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따라서 시험 성적도 낮을 수 밖에 없다.
이 사실을 그 여학생과의 면담 후에야 나는 알게 되었고, 그제서야 중간고사 때 턱없이 낮은 점수를 받아서
나를 어이없게 만든 소수의 학생들이 바로 이 집단에 속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런 불리한 위치의 학생들을 일반 인문계 고교를 나온 대다수의 정상적인 학생과 
동일한 선상에서 경쟁시켜 학점을 매기는 것은 오히려 불공정한 처사일 것이다.
아마도 이 학생들은 영어와 수학실력의 부족으로 많은 과목에서 이미 낮은 학점을 받아들고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거나, 사실상 대학공부를 포기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하러 온 여학생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미 공부에는 마음이 없고 5년 안에 무사히 졸업만 하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보통 실업계 고교에서 4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텐데,
어렵사리 대학에 와서 한학기에 300만원이 넘는 적지않은 등록금을 내면서
이 학생들이 과연 적응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그리고 자기의 미래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 것인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학생들끼리도 누가 실업계 출신인지 모른다고 하니 학생들 사이에 서로 도움받기도 힘든 것 같고
이런 학생들을 위한 학교측의 공식적인 멘토링 프로그램이 제대로 지원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교수로서 이 강좌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이런 소수의 학생들이 낮은 시험성적에 좌절하여 대학을 다니는 의미를 잃어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게끔
개개인에 대한 충분한 관심과 배려를 보여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내 수업을 듣는 학생이 나의 무관심함으로 인해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기초가 부족해서 대학공부에서 좌절하거나 아예 포기하는 일이 절대로 생기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감마저 갖게 되었다.


지난주에 상담하러 온 여학생은 단순히 시험성적이 낮고 공부 이외의 진로를 택하기로 결정했을 뿐, 정말로 열심히 살고 있었다.
주말 내내 시내에서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하고 주중에는 6과목을 들으며 하루하루 잠이 부족할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던 그 학생을 보면서
정말 배워야 할 사람은 그 학생이 아니라 교수자리에 선 내가 아닐까 싶어 부끄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외국어를 배우고, 여러 나라에서 온갖 아르바이트일을 하며 요리를 배우고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던 그 학생..
나는 20대에 그 정도로 치열하게 살지 않았고,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그 여학생만큼의 절박함에 미치지 못한다.


박사 5년차의 덜 여문 지식으로 강단에 섰지만, 오히려 아이들로부터 더 중요한 것을 배우고 있다.
이번 주부터 개별 학생들을 불러서 면담을 하고  어떤 상황인지, 어느 정도로 도움이 필요한지를 물어볼 생각이다.
내 수업을 들은 것이 미약하게나마 그 학생들의 삶에 도움이 되기를 바래본다.
어려운 환경에서 도전하는 아이들이 부디 꿈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